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문 6.4 항쟁 (문단 편집) == 상세 == ||[youtube(92jG18P3Kc4)]||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를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구글 등의 사이트에서 이 사건을 검색하면 희생자들의 끔찍한 [[사진]]들[* 당시 중국 당국의 강경하고 무자비한 진압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웹상에 떠도는 참혹한 실상을 담은 사진을 보면 거의 절반이 불에 타 죽고, 머리가 깨져 뇌가 땅에 나뒹굴거나 탱크에 깔려 피투성이가 된 사람 시체다. 구글이나 네이버 등에서 'Tiananmen' 등의 관련 검색어로 검색 시 이런 잔인한 사진이 많이 나오므로 주의해야 한다. 물론 중국 검색 엔진인 바이두에서 찾아보면 이런 사진은 검열되어 단 한 장도 나오지 않는다.]도 상당히 나오니 심약자나 보기 싫은 사람들은 주의하자. [[홍위병]]들과[* 마오쩌둥 사후 홍위병들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고 덩샤오핑 노선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개중에는 상인도, 노동자도, 언론인도, 의사도, 대학 교수도, 심지어는 공안에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다. 거기다 1980년대 말 세계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자유화의 물결로 넘실대던 시기였고, 천안문 항쟁의 소식이 전세계 언론으로 보도되자 [[미국]], [[유럽]]은 물론 개방화가 진행되던 [[소련]] 매체에서도 이 시위를 지지했다. 따라서 학생 지도부, [[베이징]] 시민, 그 누구도 [[인민해방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 진압봉과 [[최루탄]] 정도를 사용한 강제해산 정도로 끝나고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이다. 실제 학생 지도부 중 "천안문 광장이 피로 얼룩져야만 민중들이 각성할 것이다."라고 끝까지 저항을 계속한 강경파 차이링도 훗날 "기껏해야 강제해산일 줄 알았다."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이 이끌던 중공은 인민을 진짜 총칼과 [[전차]]로 깔아 뭉개버렸다.''' 당시 덩샤오핑은 텔레비전 등에 나와 이들을 난동꾼이라 비난하면서 확고한 진압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확고한 의지였나 아니면 보수파의 위협적인 부상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나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으나 결론적으로 덩샤오핑은 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이후에도 뒤집지 않았다. 특히 [[인민해방군|인민을 해방한다는 군대]]가 일당독재와 부정부패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던 [[인민]]을 짓밟았다는 점은 큰 충격이자 아이러니였다. [[반중]] 인사들은 이 사건을 '[[중국]]의 [[피의 일요일]]' 혹은 '[[베이징]] 대학살(Beijing Massacre)'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 등에 빗대어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나 '1989년 톈안먼 광장 저항(Tiananmen Square Protest of 1989)'이라고 부른다.[* 영문 위키백과의 제목도 이쪽이다.] 또 1976년의 1차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네임드. [[중국]] 당국 측에서는 '반혁명폭란'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바꿔서 '1980년대 말 춘하계 정치풍파'이라 부르지만 애초에 언급 자체를 안 하고 하더라도 중국 내 언론엔 안 실린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할 때엔 '1989년 반정부정치폭란', '1989년 정치풍파'라고도 한다. 또는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라고 순화하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화권]]에서는 무력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六四를 그대로 썼다가는 바로 검열을 받아서 그런지 "5월 35일" 정도로 부르는 모양이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그리고 1980년대 말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자 '''중국 [[민주주의]] 역사에 [[68운동|주요한 이정표로]] 남게 된 미완의 가능성'''으로 평가받는다.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반체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 투쟁과 시위 와중에 락 페스티벌을 방불케 할 만큼의 자유와 창발이 구현되었다는 점, 당시 각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격화로 인해 조성된 정국 하에 촉발되었다는 점 등에서 [[68운동]]과 교집합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